제대로 소화한 악역 한 번이 백 번 착한 역할을 맡는 것보다 낫다. 그만큼 악역이 기억에 남는단 소리다. MBC ‘왔다 장보리’ 속 악녀 연민정으로 전성기를 맞은 이유리가 지난해 연말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으며 이 사실을 입증했다. 악랄하게 독을 품고 연기한 악역 한 번이 비슷비슷한 착한 역할을 수차례 맡는 것보다 대중에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단 점을 증명한 셈.
상반기 방영된 드라마 중에서도 이만한 존재감을 뽐낸 인물들이 있다. 각자가 출연한 드라마가 얼마나 주목받았는지와는 별개의 문제다. 심지어 악역을 맡았던 배우들이 뿜어낸 에너지가 드라마 자체보다 많은 칭찬을 받았던 경우도 있다. 그만큼 연기 잘 하는 악역의 존재가 드라마 속에선 중요하단 소리다. 주인공을 사사건건 괴롭히고 방해하지만 그 덕택에 극에 활력이 생기고 주인공이 우뚝 설 수 있는 스토리적 개연성도 생기기 때문.
이에 상반기 악역으로 유독 눈에 띄었던 5팀을 꼽았다. SBS 드라마스페셜 ‘냄새를 보는 소녀’의 남궁민, MBC 수목드라마 ‘앵그리맘’의 김희원, KBS 월화드라마 ‘블러드’ 속 지진희&강성민 조합, MBC 주말드라마 ‘장미빛 연인들’의 정보석, 그리고 KBS 월화드라마 ‘후아유-학교 2015’의 신예 조수향이다.
▲ SBS ‘냄새를 보는 소녀’ 사이코패스 살인마 남궁민
주연도 아닌데 전성기 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하면 본인은 속상할지도 모를 일. 그러나 이번 ‘냄새를 보는 소녀’에서 남궁민이 보여준 모습은 주연 박유천, 신세경과 함께 감히 ‘쓰리톱’이라 할 수 있을만큼 남달랐다.
남궁민은 최근 인터뷰를 통해 “이번 드라마에 임할 때 기대도 욕심도 없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런데 결과는 놀라울 따름이다. 사이코패스이면서 안면 인식 장애가 있는 캐릭터가 자칫하면 우스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남궁민은 이를 허술하지 않은 살인마로 보이도록 잘 꾸며냈다.
앞서 출연했던 작품들을 통해 보여줬던 악역 캐릭터보다 이번 권재희 셰프가 서늘한 살인마로서 한층 악랄했던 것이 사실. 게다가 많은 화제가 됐던 MBC 드라마 ‘내 마음이 들리니’에선 짝사랑이라도 했는데, 이번 드라마에선 그런 사소한 러브라인조차 없어서 더 인간적인 면모를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것이 그가 ‘원톱’같은 존재감으로 빛날 수 있었던 까닭 아닐까.
▲ MBC ‘앵그리맘’ 섬뜩하고 무서운 재벌가 끄나풀 김희원
지난 5월 종영된 MBC 수목드라마 ‘앵그리맘’은 그야말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드라마였다. 단순히 학교 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는 것을 넘어서서 권력의 이면에 어떤 부끄러운 음모가 숨어있는지 조명했다.
당시 김희원은 박근형, 박영규와 김태훈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일개 끄나풀에 불과해보였지만 어떤 배역에도 견줄만큼 상당한 존재감을 뽐냈다. 악역 김희원은 동생의 딸인 김유정에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던 나약한 속내를 보여줄 때도 애써 무뚝뚝하고 싸늘한 모습을 견지했다. 재단에 문제를 제기하는 ‘영원한 언니’ 김희선의 숨통을 내내 옥죄며 반대세력에는 거침없이 폭력을 가했고, 신예 지수에도 차갑고 섬뜩한 눈빛을 내뿜었다. 이에 악역으로서 보여줄 것은 다 보여줬다는 평. 마지막에 이르러 결국 김희선과 손을 잡고 정의의 사도가 됐지만 앞서 보여준 악역 연기는 박수받기 충분했다.
▲ KBS ‘블러드’ 냉혈한 세트 플레이 지진희&강성민
드라마 ‘블러드’ 자체는 안타까운 시청률과 혹평 속에 막을 내렸지만 이 두 사람의 연기는 빛을 발했다. 생과 사에 대해 고뇌할 수밖에 없는 뱀파이어였지만 자신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부하들의 목숨을 거침없이 빼앗던 지진희의 모습은 섬뜩했다. 앞선 작품들에서 대체로 다정하거나 냉철해도 속은 따뜻한 엘리트 실장님 같은 면모를 뽐냈던 지진희인만큼 이번 악역 연기는 더욱 인상깊게 남았다.
여기에 방송 막바지에 뒤늦게 등장해 놀라운 사이코패스 연기를 보여준 강성민도 ‘블러드’가 가능케한 놀라운 발견. 아이돌 출신으로 연기 경력 20년에 가까운 내공을 가감없이 발휘한 강성민은 지진희보다 더욱 냉혈한에 가까운 잔혹한 살인자로 분해 ‘블러드’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켰다.
▲ MBC ‘장미빛 연인들’ 찌질한 악역 끝판왕 정보석
이렇게 치졸하고 치사한 악역은 오랜만이었다. 딸 한선화가 낳은 아이의 존재를 숨긴 것으로도 모자라 비자금을 집 앞 마당에 파묻고 정치인이 되겠다며 뻔뻔스럽게 선거 유세까지 펼쳐 그 얄미움에 실소를 금치 못하게 했다. 또한 자신이 부끄러운 행동을 했던 것 때문에 뭇매를 맞자 그것조차도 남의 탓으로 돌려 그야말로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다행이다’는 소리가 나오게 했던 캐릭터다.
종종 카리스마 있는 악역을 맡아 인상깊은 연기를 보여줬던 정보석은 마침내 ‘장미빛 연인들’을 통해 찌질한 악역까지도 무리없이 소화해낼 수 있다는 점을 입증했다. 치고 올라오는 젊은 배우들 틈에서도 중년층 악역으로 빛나는 데엔 다 이유가 있는 것 아닐까.
▲ KBS ‘후아유-학교 2015’ 이민정 언니 이젠 저예요 조수향
연민정 이후 최고의 아역으로 꼽히다니. 영광인지 욕인지 본인도 처음엔 헷갈리지 않았을까. 그러나 ‘후아유-학교 2015’가 종영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현재, 이는 분명히 칭찬이다. 그런만큼 신인 조수향의 행보가 기대된다. 악역에겐 욕을 많이 먹는단 사실이 곧 연기가 완벽했단 소리나 마찬가지기 때문.
실제 조수향은 김소현을 상대로 온갖 악행을 저질러 시청자의 눈초리를 받았다. 과거 왕따 당하는 친구를 감싸주던 김소현을 왕따시켜 투신자살까지 내몰았던 조수향은 오히려 그에게 가해자 누명까지 씌웠다. 또 왕따 사건으로 서울로 전학까지 오게 된 상황에서도 조금의 죄책감도 없었다.
하지만 종영을 앞둔 현재, 조수향은 이제 김소현에 오히려 휘둘리는 신세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시청자들도 악녀 조수향이 통쾌하게 혼쭐이 날 수 있을지 지켜보는 중이다.